유럽 전역의 독립 서점들이 최근 정체불명의 대량 도서 주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수천권 규모의 주문이 몰려들고 있지만, 주문된 책들이 지나치게 무작위적이고 오래된 실용서나 절판에 가까운 비주류 서적까지 포함하고 있어 AI 모델 학습용이라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아이리시타임스에 따르면, 아일랜드 골웨이의 유명 독립 서점 케니스 북숍(Kennys Bookshop)은 지난 5월 온라인으로 5000권에 달하는 대규모 주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대형 기관 고객의 주문으로 보였지만, 주문 목록을 살펴본 뒤 의문이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주문에는 지역 역사서인 ‘코네마라의 역사(A History of Connemara)’와 아일랜드의 특정 저축 제도를 설명하는 ‘에디 홉스의 SSIA 가이드(The Eddie Hobbs Guide to your SSIA)’같은 서로 연관성이 거의 없는 책들이 뒤섞여 있었다. 일반 독자나 대학 도서관, 연구 기관이 선택할 만한 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일 베를린의 서점들도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 이메일로 한밤중에 도착하는 대규모 주문에는 ‘운전면허 시험 합격하기, 2018년판(Pass Your Driving Test, 2018 Edition)’처럼 현재 독자 수요가 거의 없는 책들이 포함돼 있다. 주문 규모는 보통 1만~5만유로(약 1600만~8200만원)에 달해 온라인 서점과 전자책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립 서점들에는 상당한 수익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서점 업계는 이러한 주문이 AI 기업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이나 공공기관이 수천권 규모의 도서를 구매할 때는 할인 협상을 진행하지만, 최근 주문은 즉시 결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심은 최근 AI 업계의 도서 수집 관행이 드러나면서 더 커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올해 초 앤트로픽이 ‘프로젝트 파나마(Project Panama)’라는 내부 프로젝트를 통해 수백만권의 책을 구매한 뒤 책등을 잘라내는 파괴적 스캐닝 방식으로 디지털화해 AI 학습에 활용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사실은 저작권 소송 과정에서 공개된 법원 문서를 통해 알려졌으며, 이후 앤트로픽은 저자들과 출판사들을 상대로 한 저작권 분쟁에서 15억달러(약 2조원) 규모의 합의금을 지급하게 됐다. 다만 미국 법원은 AI 학습 자체를 공정 사용(Fair Use) 범주로 인정했으며, 문제는 불법 복제 도서를 사용한 점에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AI 기업들은 책 데이터 활용을 둘러싸고 저작권 논란에 휘말려 왔다. 메타는 AI 학습을 위해 82테라바이트(TB)에 달하는 불법 복제 도서를 내려받은 사실이 법원 기록을 통해 드러났으며, 엔비디아도 수십만 권의 무단 복제 도서와 대본을 포함한 데이터셋을 둘러싼 저작권 소송에 직면해 있다.

유럽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하다. 독일 출판·서점협회는 책을 스캔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과 관계없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코흐 협회 대변인은 “독일 법에서는 책을 스캔하는 행위 자체가 명백한 저작권 침해”라며 “중고 도서를 이용한 대규모 스캔이 이뤄지고 있다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독일 서점업계는 주문 과정 자체도 AI 시스템에 의해 자동화돼 있다고 보고 있다. 관계자들은 AI 봇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수집하고, 아직 확보하지 못한 책 목록을 자동으로 작성해 구매 주문을 넣고 있다고 추정한다.

베를린의 경매회사 바센게(Bassenge)에서 활동하는 미술사학자 마르쿠스 브란디스는 “ISBN은 이제 AI가 어떤 책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는지 확인하는 수단이 됐다”고 설명했다.

유럽 서점들은 최근 주문 배송지가 미국이 아니라 유럽 각지의 주소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업계는 이들 주소가 단순한 집하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유럽에서 수집된 책들이 이후 컨테이너 단위로 미국으로 운송돼 스캔 및 디지털화 과정을 거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공정 사용 규정이 관대하다. 책을 합법적으로 소유하면 이를 스캔한 뒤 폐기하는 행위가 일정 조건 아래 허용될 수 있다. AI 기업들이 미국에서 대규모 디지털화를 진행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분석이다.

앤트로픽은 성명을 통해 "클로드는 공개 웹 데이터, 상업적으로 확보한 데이터셋, 자체 생성 데이터 등을 혼합해 학습했다"고 설명했다. 또 희귀본이나 고서적을 구매해 파기하는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럽 서점업계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독일의 고서적상 우르반 체르파스는 "법원 문서로 확인된 앤트로픽 사례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며, 다른 대형 기술 기업들도 유사한 방식을 활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만유로 규모의 주문은 경영난을 겪는 서점들에 큰 도움이 된다. 온라인 서점과 전자책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문은 생존에 필요한 수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들이 판매한 책이 AI 학습을 위해 스캔된 뒤 폐기되고, 궁극적으로는 출판 산업과 서점 산업을 위협하는 기술 발전에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케니스 북숍의 토마스 케니는 “AI는 우리 업계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며 “만약 누군가가 책을 사서 지식재산을 추출하기 위해 스캔하려는 것이라면 케니스는 그런 과정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박찬 기자 cpark@ai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