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무 현장에서 AI가 만들어내는 효용은 기업의 규모에 따라 다르다.
대기업에는 법무팀과 컴플라이언스 조직이 있다. 중요한 계약이나 분쟁이 발생하면 대형 로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AI 도구를 도입할 때에는 성능과 보안, 책임 문제를 검토할 전문 인력이 있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다르다. 대표나 실무자가 영업·인사·재무 업무와 함께 계약까지 직접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서를 받았지만 어떤 조항을 확인해야 하는지, 거래처의 요구가 통상적인 수준인지, 계약 종료일과 갱신일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사안을 변호사에게 묻기도 어렵다. 중요한 분쟁이나 대규모 거래가 아니라면 비용과 시간의 부담 때문에 전문가에게 문의하는 것 자체를 망설인다. 결국 과거 계약서를 복사하거나 인터넷에서 찾은 양식을 수정하고, 검색으로 단편적인 정보를 확인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최근에는 범용 생성 AI가 이러한 역할을 일부 대신한다. 질문을 입력하면 빠르게 답을 제공하고, 계약서 내용도 그럴듯하게 요약해준다.
하지만 법률 업무에서 '그럴듯한 답변'은 충분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법령이나 판례를 제시하거나 전제가 다른 정보를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환각, 이른바 할루시네이션은 실제 기업에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위험이 모든 기업에 같은 무게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기업에서 AI가 틀린 답을 내놓으면 사내 변호사나 법무 담당자가 이를 걸러낸다. AI가 초안을 만들고 사람이 검증하는 구조다.
그런데 중소기업에는 걸러낼 사람이 없다. 같은 AI가 한쪽에서는 생산성 도구가 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리스크가 된다. AI가 확산되면 정보 격차가 저절로 좁혀질 것이라는 기대가 위험한 이유다.
따라서 중소기업에 필요한 것은 변호사를 대체하는 AI가 아니다. 계약서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고, 놓치기 쉬운 위험을 알려주며, 관련 법률 정보의 출처를 제시하고,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지점을 구분해주는 업무 보조 도구다. 일상적인 확인과 정리는 AI가 담당하고, 중요한 법적 판단은 전문가에게 연결하는 구조가 현실적인 해법이다.
남은 문제는 접근성이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별도의 구축 절차가 필요하거나 가격이 높고 사용 방법이 복잡하면 중소기업은 활용하기 어렵다. 법률 AI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기술의 정확도만큼이나 사용자가 실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진입점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 진입점 중 하나가 전자서명이다. 계약 업무는 계약서 작성과 검토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문서를 보내고, 서명 받고, 체결본을 보관하고, 계약 종료일과 갱신일을 관리해야 한다. 전자서명은 이 전체 과정이 시작되는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다.
그런데 전자서명을 건별로 과금하거나 사용량에 제한을 두면, 계약 건수가 많지 않은 소규모 기업일수록 도입을 망설이게 된다. 전자서명이 일부 기업만 사용하는 유료 부가 서비스로 남아 있는 한, 계약 데이터가 쌓이고 AI가 이를 활용해 업무를 지원하는 환경도 만들어지기 어렵다.
BHSN이 전자서명을 건수 제한 없이 무료로 제공하기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료 전자서명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니다. 중소기업이 종이와 이메일 중심의 계약 업무에서 벗어나 계약서를 안전하게 체결·보관하고, 이후 AI로 계약 내용을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을 만들자는 판단이다.
물론 접근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정확성과 보안 기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 특히 계약과 법률 데이터를 다루는 AI는 일반적인 문서 생성 도구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답변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모르는 내용을 모른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하며, 기업의 문서가 모델 학습이나 다른 고객의 답변에 쓰이지 않도록 데이터가 분리돼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고객이 대기업과 대형 로펌이다. 까다로운 보안 환경과 복잡한 계약 업무에서 검증을 거친 기술이 중소기업용 서비스로 넘어오는 흐름은 바람직하다. 경계해야 할 것은 오히려 그 반대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어력이 가장 약한 곳에 먼저 도달하는 상황이다. 검증 역량이 없는 이용자일수록 검증된 기술을 써야 한다.
AI 시대의 법률 서비스 혁신은 더 정교한 모델을 만드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법률 지식과 전문 인력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기업이 일상적인 계약·법률 업무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
AI가 법률 전문가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던 수많은 중소기업이 위험을 조기에 발견하고,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고, 중요한 순간에 전문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법률 AI의 진정한 가치는 좋은 법률 서비스를 이미 누리고 있는 기업을 더 강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지금까지 법률 서비스에서 소외됐던 기업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갖고 사업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임정근 BHSN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