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노트_입추
가을의 증거를 찾아보는 일
입추가 지났습니다. 달력에는 분명 가을이 시작됐다고 적혀 있는데요. 아직 한낮에는 여름옷이 편하고, 걸음을 조금만 빨리해도 땀이 납니다. 그래서 절기와 실제 날씨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가만히 보면 우리가 계절을 알아채는 방법은 기온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녁에 불을 켜는 시간이 조금 빨라졌다든지, 오후에 책상 위로 들어오는 햇빛의 자리가 옮겨갔다든지, 같은 시간에 걷는데 건물의 그림자가 전보다 길어진 것을 발견할 때가 있고요. 여름 내내 거들떠보지 않던 얇은 셔츠를 아침에 한 번 만져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기온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창문을 열어둔 채 자는 것이 조금 불편하고, 퇴근 뒤에는 시원한 실내로 빨리 들어가기보다 잠깐 걷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이런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계절은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을 이루고 있던 수많은 것들의 비율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빛의 길이와 바람의 방향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는 것, 걷는 시간, 오래 머무는 자리, 보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음악까지 조금씩 달라지고요.
그렇다면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것이 달라지는 동안 그것을 보고 있는 나만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저녁빛을 올해는 오래 바라봤다면 빛만 달라진 것은 아닐 테고요.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약속 하나가 요즘 부쩍 피곤하게 느껴지거나, 반대로 몇 년 동안 손을 놓았던 일이 다시 궁금해졌다면 그것도 계절만의 변화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몸을 ‘우리가 세계를 갖는 일반적인 매개’라고 표현했습니다. 몸을 단순히 마음을 담고 있는 물리적인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만나고 판단하는 방식 자체와 떼어놓을 수 없다고 본 것인데요. 그래서 몸으로 계절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쌀쌀해졌다’고 느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래 앉아 있게 되는지,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 어느 시간에 걷고 싶은지처럼 내가 세계와 맺는 방식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까지 포함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실험노트에서는 그런 변화를 조금 찾아보려고 합니다. 가을을 잘 느껴보자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치고 있던 것들을 한번 적어보는 겁니다.
1. 줄어든 것 하나, 늘어난 것 하나
지난 한두 달을 돌아보면서 먼저 두 가지를 적어봅니다.
줄어든 것 하나와 늘어난 것 하나.
여기서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만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약속이 줄었을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내 상황을 길게 설명하는 일이 줄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혼자 걷는 시간이 늘었거나,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를 한 바퀴 더 도는 날이 늘었을 수도 있고요.
조금 더 사소해도 괜찮습니다. 사진을 찍는 횟수는 줄었는데 사진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시간은 늘었다거나, 연락하는 사람은 줄었는데 한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길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각 하나씩 적었다면 이번에는 둘을 한 문장 안에 놓아봅니다.
“________은 줄었는데, ________은 늘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따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관계가 생깁니다. 시간을 덜 쓰게 된 것이 무엇인지,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보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보통 새로 생긴 것에는 이름을 잘 붙입니다. 시작한 운동, 새로 만난 사람, 새로 맡은 일처럼요. 그런데 더 이상 예전만큼 하지 않게 된 것들은 별일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내가 무엇을 시작했는지를 보는 것보다 무엇에 시간을 덜 쓰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지금의 나를 더 정확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2. 가을의 증거 다섯 개를 찾아보기
이번에는 하루 동안 가을이 오고 있다는 증거를 다섯 개 찾아봅니다.
대신 ‘날씨가 선선해졌다’, ‘나뭇잎 색이 변했다’처럼 우리가 이미 가을의 표시라고 알고 있는 것은 잠시 빼두려고 합니다. 내가 직접 발견한 것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오후 다섯 시에 카페 창가로 들어오는 빛의 위치가 달라졌거나, 동네 과일가게 앞에 놓인 것들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요. 저녁 산책을 하는 사람이 늘었거나, 며칠 전부터 아침에 마시는 음료의 온도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옷을 입었는데 소매를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올린 것도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가능하다면 다섯 가지를 조금 다르게 찾아보세요. 빛에서 하나, 거리에서 하나, 몸에서 하나, 생활에서 하나, 마음에서 하나.
그리고 각각 옆에 작은 표시를 하나 해봅니다.
밖이 달라진 것 / 내가 달라져서 보인 것 / 둘 다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애매한 것들이 재미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우리 앞에는 수없이 많은 것이 존재하지만 실제 경험을 이루는 것은 그중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무엇을 알아보았는지가 결국 우리의 경험을 만든다는 이야기인데요. (Psych Classics)
그래서 내가 찾아낸 다섯 개의 ‘가을의 증거’는 사실 가을에 관한 자료만은 아닙니다.
지난해에는 그냥 지나갔는데 올해는 유독 오래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자꾸 눈이 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 다섯 가지를 모아놓으면 지금 내 주의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도 함께 보입니다.
3. 나만의 5일짜리 계절을 만들어보기
우리가 계절을 네 개로 나누고 있는 것은 무척 편리하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날들은 그보다 훨씬 세밀합니다.
한여름이라고 부르는 몇 달 안에서도 유난히 밖에 나가고 싶었던 한 주가 있고, 사람을 만나기 싫었던 며칠이 있고요. 늦여름이라고 같은 이름으로 묶여 있어도 작년과 올해의 늦여름은 꽤 다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딱 닷새만 사용하는 계절 이름 하나를 직접 만들어봅니다.
‘저녁이 조금 아까운 계절’이어도 좋고요.
‘아직 아이스커피를 포기하지 않은 계절’, ‘괜히 먼 길로 집에 가는 계절’, ‘오래 미뤘던 것을 다시 꺼내보는 계절’처럼 생활에서 가져와도 좋습니다.
이름을 정했다면 닷새 동안 하루에 한 줄만 적습니다.
오늘 이 계절의 이름과 가장 잘 어울렸던 순간은 무엇이었는지.
닷새 뒤에는 처음 붙인 이름과 기록을 함께 봅니다. 처음에는 ‘산책이 길어지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섯 줄을 모아보니 사실은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진 때였을 수도 있고요. 반대로 조금 쓸쓸한 시기라고 생각했는데 기록에는 새로 궁금해진 것들이 잔뜩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절 이름을 바꾸어도 됩니다.
우리는 지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시간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요. 그때는 힘든 시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무언가를 그만두는 법을 배우던 때였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다음 것을 고르느라 오래 망설이던 때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기도 합니다.
5일짜리 계절에는 틀린 이름도 없습니다. 닷새 동안 사용하고 필요하면 다시 고치면 됩니다.
4. 아직 티 나지 않지만 달라지고 있는 것
이번에는 조금 다른 변화를 찾아봅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변화 말고, 다른 사람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은 변화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거나 큰 결정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요. 이전에는 메시지가 오면 바로 답해야 마음이 편했는데 이제는 조금 두고 답하게 됐다거나, 예전에는 거절한 뒤 이유를 길게 설명했는데 요즘은 한두 문장으로 끝내기도 한다거나, 회의에서 빨리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질문 하나를 더 해보게 되었다는 식의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는 기록해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달라진 행동만 남고 그 행동이 처음 시작됐던 아주 작은 순간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문장만 적어봅니다.
“아직 티 나지는 않지만 요즘 나는 ________하는 쪽으로 조금 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유는 바로 쓰지 않아도 됩니다. 며칠 뒤에 다시 읽어보고 그때 한 줄을 보태도 좋습니다.
무엇 때문에 달라졌는지를 금방 설명하는 것보다, 먼저 내가 실제로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보는 편이 더 정확할 때도 있으니까요.
이런 기록을 한다면 뭐가 좋아질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쉽고, 빠르고, 평균적으로, 더 나은 답을 얻는 일이 쉬워질수록 오히려 어떤 것을 중요하다고 여길지, 널려있는 답 가운데 무엇을 모아갈지는 더 중요해 졌습니다.
2025년 CHI에 발표된 Microsoft Research의 연구에서는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지식노동자 319명의 사례를 살폈는데요. AI의 결과를 더 신뢰한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업무 과정에서 비판적 사고를 했다고 보고한 정도가 낮았고, 반대로 자신의 판단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높은 경우에는 더 많은 비판적 사고가 나타났습니다. 연구진도 AI를 쓰면 사고가 사라진다고 단순하게 결론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해야 할 사고가 정보를 직접 만들어내는 데서 결과를 검토하고, 통합하고, 최종 판단하는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내면지도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감정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라기보다, 나는 무엇을 눈여겨보는 사람인지, 무엇에는 예전보다 시간을 덜 쓰고 있는지, 무엇을 편안하다고 느끼고 무엇 앞에서는 자꾸 망설이는지를 조금씩 표시해두는 일에 가깝습니다.
길을 대신 찾아주는 도구가 많아져도, 내가 어느 길을 좋은 길이라고 부르는지는 대신 정해줄 수 없듯이요.
그래서 입추가 지난 이번 주에는 달력 대신 조금 다른 방법으로 계절을 확인해봐도 좋겠습니다. 줄어든 것과 늘어난 것을 하나씩 적어보고, 우리 동네에서 가을의 증거를 다섯 개 찾아보고요. 닷새 동안만 쓸 계절 이름을 하나 만들어보고,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티 나지 않는 내 변화를 한 줄쯤 남겨보는 겁니다.
닷새 뒤에 기록을 다시 펼쳐보면 가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대신 이런 것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 보였거나, 매년 오는 계절인데 올해는 조금 다른 것을 가을의 증거로 골랐다는 것.
달력에는 같은 이름으로 적혀 있는 입추라도,
우리가 발견하는 계절까지 매년 같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연(Ayn) ('서점여행자의 영감수업' 등 콘텐츠 기획)